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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가미(구병모, 위즈덤하우스)취향의 조각/읽은 것 2020. 1. 11. 20:50
*2018.08.23 쓴 글
요즘 너무 무료하던 차에 친구에게 추천을 받아 읽게 된 <아가미>. 친구에게 어떤 내용이냐고 물어봤을 때 아가미를 갖게 된 한 남자아이가 살아가면서 괴롭힘을 당하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야.라는 대답에 그다지 끌리지 않았었다. 오히려 <아가미>와 같이 추천을 받았던 <파과>가 더 끌렸었는데, 이거 안 읽었으면 억울해서 어쩔뻔했나 싶다.
여튼 내용은 의도치 않은 실수(?)로 강물에 뛰어들게 된 해류가 곤에 의해 구해지는데 그를 찾아 나서며 알게 되는 그들의 이야기(?)이다. 읽으면서 곤이 살기 위해 존재감을 최소화하는 모습들이 너무 짠했다. 처음부터 곤이 행복했으면 했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강하가 괴롭히거나 할 때마다 긴장하면서 본 거 같다(나중에 알고 보니 강하는 곤을 위한 행동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요즘 읽고 보는 작품들마다 이런 새드엔딩이라 계속 먹먹한 상태였는데 곤까지 강하와 할아버지를 찾으러 다니는 모습을 보니 눈물 날뻔했다. ㅜㅜ
책 속 문장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이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반드시 떼로 몰려다니며 유명한 휴양지를 미션 수행하듯이 들러서 사냥하듯 사진을 찍고 그 시간과 공간을 프레임 안에 박제하는 것만이 여행인 건 아니니까요.
나는 언제쯤 여유 있는 여행이 가능해질까 생각이 들었다. 매번 여행지 도장깨기(?) 느낌으로 여기 왔으면 그곳을 가야 된대!! 가보자!!! 이런 느낌이라 장소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거기 옆에 굴러다니는 신문지 쪼가리라도 덮고 있어요. 나도 이 꼴이라 딱히 덮어줄 게 없으니까. 기껏 나왔는데 저체온증으로 죽으면 안 돼요. 정신 차리고 눈 부릅뜨고 있어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말투는 구어적이고 구체적이라 도무지 안 어울려서 내 인식은 현실감으로부터 더욱 멀어…또다시 물에 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예요.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세상 쿨한 해류의 독백(?)이 너무 좋았다.
"너야말로 있는 대로 귀찮다는 티를 냈으면서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구나."
"귀찮은 건 맞는데 내버리자고는 안 했어. 이런 몸으로 어디 수상한 연구실이나 아쿠아리움에 끌려가지 않을 것 같아?"잔병치레 같은 것도 없이 또래에 비해 비상식적으로 보일 만큼 조용하고 얌전하여 노인에게 거의 부담을 주지 않았는데, 그와 같은 태도는 자신이 생활하는 면적을 최소화함으로써 어디로도 보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본능에서 나오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침울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처음부터 그곳이 자기 집이었던 양 노인에게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일 때면, 강하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불퉁한 눈초리와 크게 대조되었기에, 노인의 마음은 해토머리의 잔설처럼 녹아내렸다.
이런 생존본능적인 자세의 곤을 볼 때마다 마음 아프면서도 다행히 긍정적인 노인의 반응에 안심했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혼자 긴장하고 난리를 치면서 읽었다.
비로소 피부와 근육에 낯설고 곤혹스러운 통각이 스며드는 듯 입술을 비죽거리다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 씨발, 입 닥쳐!"
강하가 소리를 지르고 노인은 아이를 달래고 아수라장이 되는 바람에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아이는 울먹거리면서 강하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아파? 호.
"치워."
강하는 아이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물론 그때의 강하는 아이가 자연스럽게 상처에 손을 뻗는 그 동작이 아마도 생전의 부친에게서 배운 거의 유일한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그러므로 강하는 이 세상의 가시광선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새로운 신체 조직이 남들 눈에 쉽게 띄는 얼굴까지 번져나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남들이 보는 순간 더 이상 숨겨놓고 혼자만 아는 것이 될 수 없었다. 비니와 긴팔 옷은 괜찮지만 복면을 씌우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 애정 하는 소설의 작가님이 생각났다. 옛날 천리안 시절에 연재하시던 분인데(직접 천리안에서 연재분을 읽은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그 소설은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는 물에 뒤섞이고 곤은 의식이 아득해졌지만 그건 호수에서 묻혀 온 이끼와 물때를 씻으려는 것이며 강하가 자신을 살려두었다는 뜻임을 알았다. 사람은 자신의 몸에 입힌 기억이나 행위에 밀착되어 쉽게 벗어날 수 없었으며, 곤은 자신을 구해준 강하가 그렇게 즉흥적으로 부레가 끓어서 자신을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곤이 주저앉은 바닥을 무심코 내려다보니 가게 안쪽에서 씻어낸 피가 흘러나와 땅을 짚은 손가락을 훑으며 시장 바닥의 두툴두툴한 골을 따라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 집에다 팔아넘긴다."
공포는 비린내와 함께 절정을 이루었다.
"머리부터 자르고 뼈까지 발라내서 씹어 먹히는 거지."
곤은 강하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다만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정신없이 강하의 다리를 잡고 일어섰다.잠깐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간의 흔적이 곤의 몸에는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가령 너무 길어져 어깨선을 넘은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자를 때 같은. 그전의 몇몇 경험에 비추어 언제라도 가윗날이 목을 베거나 손톱깎이가 손가락을 자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곤은 때때로 움찔했으나, 강하가 쥔 날붙이는 뜻밖에도 조심스러우면서 섬세한 궤적을 그리며 해묵은 시간의 각질만을 정확히 제거해나가곤 했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해묵은 시간의 각질이라고 표현한 게 너무 좋다.
"날 죽이고 싶지 않아?"
그것은 강하가 원하면 그렇게 되어도 할 말 없다거나 상관없다는, 가진 거라곤 남들과 다른 몸밖에 없는 곤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그때 라이터에 간신히 불꽃이 일어났다.
"……물론 죽이고 싶지."
작은 불꽃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바람에 곤은 그 말을 하는 강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곤한테 다시 후드를 씌운 뒤 조임줄을 당겨 머리에 단단히 밀착시키고 강하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진짜... 이 부분은 진짜, 5번을 다시 읽었던 것 같다. 너무 좋아서.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곤이 강하로 인해 행복함을 느끼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보지 않아도 그냥 상상만으로도 알 거 같았다.
- 아가미
- 국내도서
- 저자 : 구병모
- 출판 : 위즈덤하우스 2018.03.30
이틀 만에 아가미 격파하고 오늘은 파과를 사러 가야겠다. 아니 그전에 아가미부터 한 번 더 읽고 사야겠다. 희희. 많은 독서인(?)들이 그러던데,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산 책들 중에서 읽는 거다! 덮어놓고 사다 보면 언젠간 읽는다!